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무당벌레


길이 더 없다면 사뿐 날아가지

이게 다 끝이라면 팔랑 날아가지

나는 길도 경계도 없는 곳으로

많은 시선을 뚫고 팔랑 날아가지

나의 한계일까 너의 한계일까 이 끝에서

머무르지 않고서 난 팔랑 날아가지

내가 가진 날개로 사뿐 날아갈 수 있지

네가 가진 날개는 나에게 묻거나 너에게 묻거나

나에게 묻거나 너에게 묻거나

11/12

무당벌레의 습성이 갑자기 생각난 것은 이윽고 찾아온 내 모습에 대한 반성과 희망 때문이었다.아래에서부터 부단히도 조금씩 올라가고 있는 나인데, 내가 끝이라고 생각되면 어쩌나 싶었다. 하지만 마르고 돋아날 나의 날개,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. 그곳이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더 높이 날아갈 수 있을 거라 믿어보고 싶다. 무당벌레는 아래에서부터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가는 습성이 있다. 그리고 끝에 다다르면 그 때 날개를 펴고 날아간다. 나도 내가 끝이라 여기는 그 순간, 끝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더욱더 훌륭해질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소망하며 글을 써 내려 갔다. 처음에 "많은 시선"이 아니라 "많은 이의 숨"이었다. 숨이 들어가니 뭔가 끝에 다다라서 자살을 하는 내용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. 끝에 봉착한 이들을 위해 가능성을 노래하고 싶은 건데 이 세상을 하직해버리자는 생각이 들지 않게 쓰고 싶었다. (안그래도 어머니는 이조명가사장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다. "도미니코가 쓰는 곡들이 이렇게 우울한 건 뭔가 이유가 있을거다.") 2년 전 서울에서 내쫓기다시피 인천으로 온 나는 알 수 없는 우울감과 불안감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. 서울에 살지 않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지 스스로 정확하게 결정 내리지 못해서 일 것이다. 하지만 그래도 '난 이게 끝이다'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미래에 한계에 봉착하고 고개를 숙일 나에게 이 노래를 쓰지 않았을까. 그렇다면 조금 희망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. 요즘은 그렇게 되기 위해 쓰는 곡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. 다진이는 마지막이 이해가 안된다고 하더라 곡에서의 너는 줄기가 아니냐고, 그런데 날개를 묻는 다는 것은 무엇인지. 곡에서의 너는 곡을 듣고 있는 그대가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. 너의 가능성을 스스로 물어보고 성찰하거나, 아니면 그냥 묻어두거나. 어찌 됐는 나의 날개는 분명 내 안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.

미사곡이나 옛날 동요들처럼 (그렇다고 동요를 쓸 생각은 아니었고 동요처럼 들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.) 짧은 4절곡을 만들고 싶었다. 곡의 길이는 언제나 짧게. 그리고 FM7튜닝의 곡을 한 곡 더 만들어보고 싶었다. 리프를 만들고 다진이가 좋아해줬다. 그럼 만들어보자. 기타플레이는 <둥글게 굴러가는 네모난 나>와 비슷해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핑거링 패턴이 비슷해서 중간에 변주를 주거나 악센트를 다른 박자에 두려고 의식했다. 처음 곡을 쓸 때 많이 썼던 Ⅳ-Ⅴ-Ⅵm 진행이라 만들고 보니 망설인 점도 있었다. 창작을 하는 입장에서 비슷한 그것을 생산해냈다는 느낌은 그렇게 달갑지 않다. 하지만 반대로 이런 것에 얽메인다면 자유로운 창작에 장애물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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